인간의 흑역사

세상의 패턴을 읽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계획을 짜서 실행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지적인 인간이 어떻게 뻘짓을 반복했는지 무수한 예시를 신랄한 어조로 늘어놓았다. 몇 가지 바보짓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독재와 민주주의, 전쟁, 식민주의, 환경파괴 등이다. 고대부터 펼쳐치는 인간의 바보짓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외교인데, 미국이 정말 대단하다. (피델 카스트로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는 것을 알고 CIA가 폭탄을 설치하기 위해 조개를 대량으로 사들였다는 짧막한 에피소드는 좀 웃겼다.) 안그래도 오늘 넷플릭스의 터닝포인트를 다 보긴 했다. 미국은 소수의 엘리트가 이끌어나가고 또 소수의 엘리트가 말아먹는다는 느낌? 내가 젤 잘났고 착해서 왜 다른 나라가 자기를 싫어하는지 생각해볼 정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고. 외교는 생물의 창발성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는 듯, 상호작용으로 뭐가 생길지 경우의 수가 너무나 많기도 하다. 작가가 너무나 쉽고 간결하게 냉전시대부터 2010년대까지 미국의 중동 외교 정책을 정리해놓은 부분을 옮겨놓겠다.
p219 (전자책)
...형편없는 의사결정이 세계적으로 장기간 판을 쳤던 냉전 시대, 미국은 '공산주의자 아님'이라는 기준에만 맞으면 아무하고나 다 동맹을 맺었다. 그렇게 맺은 동맹의 상당수는 한마디로 그냥 나쁜 놈들이었다.(예를 들어 아메리카의 온갖 독재자들, 베트남의 형편없는 통치자들). 하지만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으니, 그 동맹 상대들은 알고 보면 애당초 미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예컨대 최근 수십 년만 해도 미국은 알카에다와 계속 무력 충돌 중인데, 알카에다는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이 그 기원이고, 무자헤딘은 소련과 싸운다는 이유로 미국이 이전에 지원해주었던 조직이다...같은 시기에 미국은 이라크와도 무력 충돌 중인데, 원래 이라크는 이란과 싸운다는 이유로 미국이 지원했던 나라다. 이란이 미국과 맞섰던 것은 이전의 반소 독재 정권을 미국이 지원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또 ISIS와도 무력 충돌 중인데, ISIS는 전후 이라크 알카에다에서 유래한 단체로, 현재 이들을 포함해 최소 세 편이 시리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시리아 정권을 지원했는데 그 정권의 적을 지원하려다 보니 시리아 정권과 맞서게 됐다. 그런데 시리아 정권의 적 중 일부가 ISIS와 동지였으니, ISIS는 미국의 적이면서 또 미국의 적의 적인 셈이다. 그런데 그 정권의 적의 또 다른 동지들은 미국과도 ISIS와도 적이다.
5부작 다큐멘터리 뼈대 정보가 여기 다 들어있다. 9.11과 이라크 전쟁, 빈라덴 살해, 탈레반의 카불함락까지 모두 내가 목격한 동시대의 사건이지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지나가 버린다.